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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봄바딜의 노래들

Hey dol! merry dol! ring a dong dillo!
Ring a dong! hop along! fal lal the willow!
Tom Bom, jolly Tom, Tom Bombadillo!


헤이 돌! 메리 돌! 링 어 동 딜로!
링 어 동! 깡총 뛰어! 팔 랄 버드나무!
톰 봄, 유쾌한 톰, 톰 봄바딜로!

Hey! Come merry dol! Derry dol! My darling!
Light goes the weather-wind and the feathered starling.
Down along under Hill, shining in the sunlight,
Waiting on the doorstep for the cold starlight,
There my pretty lady is, River-woman’s daughter,
Slender as the willow-wand, clearer than the water.
Old Tom Bombadil water lilies bringing
Comes hopping home again. Can you hear him singing?
Hey! Come merry dol! Derry dol! And merry-o,
Goldberry, Goldberry, merry yellow berry-o!
Poor old Willow-man, you tuck your roots away!
Tom’s in a hurry now. Evening will follow day.
Tom’s going home again water-lillies bringing.
Hey! Come derry dol! Can you hear me singing?


헤이! 오라, 메리 돌! 데리 돌! 내 귀여운 여인!
날개달린 찌르레기와 바람은 가벼이 날고,
언덕 저 아래, 햇빛이 반짝이는 곳,
차가운 별빛을 기다리며 물가에 서 있는
어여쁜 내 사랑, 강의 여신의 딸,
버드나무보다 날씬하고, 강물보다 맑은 여인.
늙은 톰 봄바딜은 수련을 가지고
깡총깡총 집으로 돌아간다. 그의 노래 들리는가 ?
헤이! 오라, 메리 돌! 데리 돌! 메리-오,
골드베리, 골드베리, 유쾌한 노란색 베리-오,
불쌍한 버드나무영감, 네 뿌리를 감추어라!
톰이 달려간다. 해가 지면 저녁이 오는 법,
톰은 수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헤이! 오라, 데리 돌! 내 노래 들리는가 ?

Hop along, my little friends, up the Withywindle!
Tom's going on ahead candles for to kindle.
Down west sinks the Sun: soon you will be groping.
When the night-shadows fall, then the door will open,
Out of the window-panes light will twinkle yellow.
Fear no alder black! Heed no hoary willow!
Fear neither root nor bough! Tom goes on before you.
Hey now! merry dol! We'll be waiting for you!



깡총 뛰어, 꼬마친구들, 위디윈들강을 올라오게!
톰은 촛불을 켜야 하니 먼저 간다네.
서쪽으로 해가 지면 곧 엉금엉금 기어야 하니까.
밤의 그림자가 내려앉으면 문이 열리고
창 밖으로 노란 불빛이 반짝이지.
검은 오리나무도, 백발의 버드나무도 두려워하지 말게!
뿌리도 가지도 두려워말아! 톰이 앞장을 섰으니.
헤이 어서! 메리 돌! 자네들을 기다라겠어.

Hey! Come derry dol! Hop along, my hearties!
Hobbits! Ponies all! We are fond of parties.
Now let the fun begin! Let us sing together!



헤이! 오라 데리 돌! 깡총 뛰어, 다정한 친구들!
호비트! 조랑말! 모두 함께! 우리는 친구를 좋아하지.
자, 즐거운 잔치를 벌이자! 함께 노래부르세!


Now let the song begin! Let us sing together
Of sun, stars, moon and mist, rain and cloudy weather,
Light on the budding leaf, dew on the feather,
Wind on the open hill, bells on the heather,
Reeds by the shady pool, lilies on the water:
Old Tom Bombadil and the River-daughter!



자, 노래부르세! 함께 노래부르세!
해와 별, 달과 안개, 비와 구름.
새싹 위의 햇빛, 깃털 위의 이슬,
광활한 언덕 위의 바람, 야생의 히드꽃,
그늘진 연못가의 갈대, 물 위의 수련을.
늙은 톰 봄바딜과 강물의 딸!



Old Tom Bombadil is a merry fellow,
Bright blue his jacket is, and his boots are yellow.
None has ever caught him yet, for Tom, he is the master:
His songs are stronger songs, and his feet are faster.


늙은 톰 봄바딜은 유쾌한 친구,
자켓은 하늘색, 구두는 노란색.
아무도 그를 붙잡지 못하지, 그는 주인이니까.
그의 노래는 가장 힘찬 노래, 그의 발은 가장 빠른 발.



I had an errand there: gathering water-lilies,
green leaves and lilies white to please my pretty lady,
the last ere the year's end to keep them from the winter,
to flower by her pretty feet tilt the snows are melted.
Each year at summer's end I go to find them for her,
in a wide pool, deep and clear, far down Withywindle;
there they open first in spring and there they linger latest.
By that pool long ago I found the River-daughter,
fair young Goldberry sitting in the rushes.
Sweet was her singing then, and her heart was beating!

And that proved well for you - for now I shall no longer
go down deep again along the forest-water,
not while the year is old. Nor shall I be passing
Old Man Willow's house this side of spring-time,
not till the merry spring, when the River-daughter
dances down the withy-path to bathe in the water.



난 거기 심부름을 갔었지, 내 귀여운 여인을 위해
수련과 푸른 풀잎과 흰 백합을 꺾어 오는 일,
겨울이 오기 전 올해의 마지막 걸음이었지.
눈이 다시녹을 때까지 그녀의 어여쁜 발을 치장할 꽃,
해마다 여름이 끝날 때면 그녀를 위해 꽃을 찾으러 가지
위디윈들 강 저 아래에 있는 넓고 깊고 맑은 연못으로
이른 봄 가장 일찍 꽃이 피고 가장 늦게 꽃이 지는 곳,
그 연못가에서 먼 옛날 강물의 딸을 보았지
골풀 속에 앉아 있던 아름답고 젊은 골드베리!
그녀의 노랫소리는 달콤했고 그녀의 가슴은 뛰고 있었지.

그러면 이해가 잘 되었겠지, 이제 다시는
숲속의 강물을 따라 깊숙히 가지는 않겠네,
이 해가 가기까지는. 또한 봄이 오기까지는.
다시 버드나무영감의 집을 지나지 않으리,
즐거운 봄이 오기까지는. 봄이 와 강물의 딸이
춤추며 강변을 따라내려가 목욕할 때 까지는.


Ho! Tom Bombadil, Tom Bombadillo!
By water, wood and hill, by the reed and willow,
By fire, sun and moon, harken now and hear us!
Come, Tom Bombadil, for our need is near us!


호! 톰 봄바딜, 톰 봄바딜로!
물이나 숲, 언덕, 갈대, 버드나무 옆이나
불이나 해와 달 어디에 있더라도 이제 우리의 소리를 들어 주오!
오라, 톰 봄바딜, 우리는 그대가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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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폴로배어 2014.12.23 15:31 신고

    복사해 갑니다.

창조란 "공허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창조란 "질서와 상식에 대해 변형을 가하여 다른 질서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기존 질서를 부분적으로 파괴하는 속성이 있다.

결국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유에서 다른 유를 창조하는 것의 차이일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중간 과정이 없이 마지막 모습을 이룬것일까?
중간존재를 가정하는 순간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므로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나 질서와 상식에 대해 변형을 가하는 것은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에서 유라는 것과 유에서 다른 유를 창조하는 것으로 대치될 수없다.


유에서 다른 유를 창조한 다는 것은 중간 존재를 먼저 만들고
중간존재의 재결합을 말하는 발명수준의 것과,
마지막모습에 대한 변형을 이루어, 다른, 하지만 비슷한 질서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분리될 수 있을까?

창조가 공허나 혼돈에서 질서로 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라면,
공허가 아닌 혼돈에서 질서에 대한 것은 중간존재의 재결합을 말하는 것이며,
결국, 무에서 마지막 모습으로바로 귀결된 창조보다는
중간 존재를 건너이루어진 모습을 말함이리라..

내가 화학에서 놀란 것은, 원자들이 사실은 다양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의 숫자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원자는 그러한 작은 입자를 중간존재로 하는 안정된 질서체계, 즉 마지막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 원자들이 분자를 이루고, 분자들이 모여 유기물과 무기물,
나아가는 호흡이 있는 생명의 근간을 이룬다.
결국, 생명에 대한 것을 단지 물질의 관점에서 보면,
흙으로 만든 것이며, 처음부터 무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게 된다.

내가 보기에 작은 입자들의 조합에 의한 다른 원자를 만드는 것부터
마지막 모습에 대한 변형을 이루어 비슷한 질서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창조란 재료와 결과에 대한 과정을 말한다기 보다는 "의도"의 존재에 대한 것을 말한다.

결국엔 공허와 혼돈에서 질서가 생겼고, 인간들은 비슷한 창조성으로
질서에 약간의 변형을 가하여, 기존질서에 대해서는 혼돈이라 여겨지지만,
다른 질서를 이루는 것은 극히 현상만을 다루는 문제이며
이들이 창조의 본질문제에 들어가서는 아니될 것이다.

창조란 의도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따라서 의도있게 진화되었으면, 그것도 창조아닐까?


뉴스엔조이의 기사에 대한 독자의 글중에 유시민 복장사건과 관련한 글을읽다가 생각난것을 전개시켜보다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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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라 칭해지는 것 중에 프로그래밍만큼 그 허와 실이 다른 경우가 있을까?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일반적인 이야기는 이 글을 읽고 있을 프로그래머에게는 너무 식상한것일테니
난, 8bit시절부터 컴을 다루던, 우리나라의 80년대 컴키드로 시작을했다.
그 부류의 사람들은 크게 게임을 하던사람들과 할 게 없어서 어셈블리까지
하던 부류로 나뉠 것 같다.

누구는 그렇지 않겠냐마는 나에게 있어서도, 컴에 대한 매력은 게임보다는
내가 작성한 베이식(당시에는 베이직으로 많이 불리었던..)언어를 돌리다보면
척척 결과를 내는 것에 매료되어 하다가하다가 변태(?)적인 성향을 띄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그런식으로 지냈으니 컴에 대해서 얼마나 단순했으랴.

그간의 수많은 일들을 제쳐두고, 나이 30이 넘은 지금 고민이 많다.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논리적인 문법과 OS, library에 대한 이해만 완벽하면,
모든게 두렵지 않은 것이 없고, 새로운 것이 없어 보인다. 그것이 네트워크
프로그램이건, System 프로그래밍이건, 베이식으로 된것이건, SQL로 됐든,
지겹다 하리만치 보고 또 봐도, 적정한 수준의 타협만 끝나면, 마치 알건
다 안다는 듯 거만한 생각이 비집고 들어선다.

이런 것일까? 어떤 일을 해도, 자만에 취해사는 것일까? 유독 프로그래머만 그러는 것일까?

이젠 사람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요구하고 있고, 그것이 사회적인 요구사항이
돼가는 것 같다. 사람들이 싫다기 보다는 사람다루는 것이 서툴기 때문이다.
전문직 관리인, 중간 관리자로서의 역할은 쓴 모습을 많이 보아온 나에게는
도전과 포기의 두 마음이 공존한다.

결국 남는 것은 컴에 대한 지식과 사람다루는 법일 뿐인데,
사람다루는 법을 힘들이지 않고 배우려는 얍실한 생각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젠, 하기싫어도 해야하는 나이(?)가 자연스레 된 것일까?

좀 늦출 수는 없을까? 잠시 해야할 일이 남아 있는데, 못한 것이 몇가지 남아 있는데.
정말인데,

그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한다면, 난 그 사림이 내 가까운 사람이 아니고서는
쉽게 말할 수 없다. 다만, 이해해달라는 말밖에는...
아니 가까운 사람이 물을지라도 난 답할 수 없다. 그것이 말로 정확히
정리돼본적이 없으므로.

프로그래머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일이다.

10년 넘게 높은 급여를 받을 수도 없으며, 더 높은 급여를 위해서는 몇가지 수반되는
사람관리, 프로젝트관리라는 것이 필수가 되는 것. 즉, 코딩의 질보다는
납기준수에 대한 능력이 더 중요한 것이 현실이다.

현실은 고객으로부터 나오며, 고객과 먼 개발은 사실상 이윤추구와 거리가 먼 것이다.
그것은, 고객이 개발의 질보다는 원하는 기능이 적당한 시간에 나오는 것이므로,
나의 추론은 증명된다고 할 수 있다.

적절한 업무 프로세스에 대한 것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퍽이나 지쳤나보다.
업무 프로세스이후에 할 일도 많은데, 그것조차 없는 상황을 불평하는 것도
이젠 싫증이 났다.

혼자할 수 있는 전문직이었으면, 오히려 쉬웠을텐데...
왜 하필 프로그래머였을까?

내가 고민하는 것이 이렇게 단순한 것일까? 결국 밥그릇일뿐...
용기없는 거지의 한켠에 쪼그리고 있는 초라한 모습이라니...

-- 지민이를 보러 내려온, 대전 원내동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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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i hyun 2005.09.15 00:36 신고

    그려...
    다들 한번쯤 해보는 고민이구나.
    너무 초라해 하지 마라. 프로그래머 아닌 사람도 다들 생각해 보는 나인가 보다.
    오랫만에 네 글 보니 반갑다.

  2. 아쿠아 2007.05.02 10:56 신고

    읽을거리 많네요...............

    다 읽고 갈께요.

    언제 다 읽지......허더더더더;;;;

국민학교 들어 가기전의 기억은 몇개 없다.
태어난지 6년이라는 시간동안의 기억이 단 몇 컷이라니,
정말 컷으로밖에 기억되지 않는 순간만 흑백으로 들어 있을 뿐이다.
내 어릴 적 사진으로부터 기억과 분리해서 적기란 힘든 것이다.
지금 적는 것은 사진으로 갖고 있지 않는 기억들이다.
사실 어릴적 사진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기억하는지, 원래 기억하고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 동생 수술 받아 입원해 있는 날, 아버지는 손수 밥을 하셨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시고...
* 어느날, 부산에 살고계시는 (현재는 부천에 사시는) 고모부께서 장난감 탱크를 사오셨다.
그놈은 뿅망치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는 윗부분을 치면 실제로 플라스틱 포탄이 앞으로 나가는 위력적인 장난감이다.
* 동생이 팔에 화상을 입었다. 재진인지 인선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 동생이 변을 잘 못보는 것 때문에 관장을 했다. 재진인지 인선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박정희가 죽었다는 신문을 보았다. 누군지는 몰랐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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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통해 도움을 요청할때, 최근의 서비스는 지능적인면이 있다.

''' "지금은 전 상당원이, 통화중이오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이런 것은 어떨까?

''' "당신은 지난번 통화때, 75번 상담원과 통화하셨습니다. 현재 75번 상담원은 통화중오니, 대기하시려면 1번을 다른 상담원과 연결을 원하시면 2번을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

프라이버시 문제가 생길 수 있을까?
구내 전화의 경우 외부로 나가는 모든 발신자 전화번호가 같을 수 있으므로, 조금 효용이 없겠구만.
그렇다면, 시작번호가 이동전화 번호라든지, 별정통신 사업자가 아닌 식별번호일 경우에만 저장할 수 있는 옵션을 가진다면,
ARS 시장에 도움이 될 것도 같은데 말이지...

없다면.. 누가 만들려면 만들던가...
에잉.. 나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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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27. Wed.

이글은 사람이 어떻게 욕심을 부리게 되는가에대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어린아이를
키우다보니 신기한것중 하나는, 배고플때 젖을 물리면 먹고 싶은 양 이상은 먹지 않는
것을 보았다. 정말 단순하지만, 이 아이가 언제부터는 자기가 먹고 싶은양 외에도 더
먹는 날이 올 것이다. 아까워서, 또는 맛있어서. 어떻게 그런 변화가 생기는 걸까.
누가 그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라는 암시를 주었을까?

생명이라는 것은 자극을 받으며, 외부 세계와 통신을 하게 된다. 그 상황의 다양한
반복이 자기 존재와 생명이라는 본능과 연관되어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자극에는
다음 세가지의 경우가 있을수 있는데, 이는 생명이 처하게 되는 기본적인 상황이다.

첫째로는, 자극이 없는 상황인데, 사람이 자극이 없다보면, 아마 죽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것은,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며, 그것은 본디 관계를 통해 자기를
알아가는 샘명 현상의 기본적인 능력을 거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적당한 자극이 있는 상황이다. 적당한이라는 말이 참 애매한데, 인간은 그
자극을 느끼는 어느정도의 한계가 있으며, 그 이하는 자극이라하지 않고, 그 이상은
무리한 자극이라 한다. 이 한계를 역치라하며, 역치는 성장하면서 늘어 나는
것이며, 그 역치 정도에서 받는 자극은 "일상"이라는 말로 표현 된다.

세째는, 과한자극을 말한다. 위에서 말한, 역치이상의 자극이며, 의식, 무의식적으로
역치이상에 대한 자극이 모여, 성장하게 된다. 아이가 걸을 수 있게 되기까지 수많은
역치이상의 자극에 대한 경험이 바탕이 된다.

이 세 가지 경우를 보건데, 성장이라는 것은 과한자극이 조금씩 쌓여 생명을 강하게
만들고, 강한 자극 속에는 일부, 성취감과, 어떤 만족이 수반되므로 즐거움으로 남게
된다. 이때, 과한 자극의 한계를 우리는 두려움이라 부른다. 적당한 자극만 있는
일상을 벗어나, 과한 자극이 주어 지지만, 그 과한 자극의 어느 정도에 대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며, 이는 뇌리에 두려움이라는 경험으로 존재하고, 이는
자극 받는 방법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남게 된다.

어릴때에는 적당한 자극에 대한 역치가 너무 낮아, 어떤 조그만일을 해도 과한
자극에 대한 경험이 되며, 성인 봤을때는 늘 모험하며 지내는 삶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과한 자극은 이렇듯 성장을 수반하면서 동시에 두려움에 대한 경험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두려움. 이는 생명으로 하여금, 미래를 준비하게 만든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현재 필요한 것이상을 소유하도록 의지를 발동시키며, 여기에서 의지의 역치가
과도한 의지에 의해 늘어 나게 되고, 이를 우리는 욕심이라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탐닉이라는 것은 그 근본이 두려움에서 출발한 "미래대응의지"를 잊고, 두려움과는
상관없이 자극에 대한 역치 이상에서 즐기는 상황을 말한다.

자극은 인간이 느끼는 모든 일차적인 외부의 정보이며, 인간의 지능은 이 자극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하는 정보체계에 의해 반응하는 복잡한 이성체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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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3.28. Fri.
가슴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부터 머리로 생각한다는 개념이 보편화되었을까?
과연 생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정신적 활동은 육체의 자극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또는 그 반대는 어떤관계에 있을까?

이 생각의 시작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미이라를 만들때, 코를 통해서 뇌를 빼낸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 이유는 그들 문화에서는 생각하는 위치가 가슴이라고 여기는 데
있다고 들었다. 그말이 사실이건 거짓이건간에,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했으며,
당장에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생각하는 기관이라고 알고 있는 집단을 상상했으며,
그런 문화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를 즐거운 상상쯤으로 사유해보았다.

그 뒤로 시간이 날때마다, 가슴으로 생각해보려고 했으며, 심지어는 머리가 아닌
손가락 끝으로 생각을 해보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당히 어렵다.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려는 생각조차 머리에서 일어난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머리로 생각한다는 보편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이 혹시 우리의
가장 큰 외부 기관인 눈과 귀가 머리에 붙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아니면,
뇌라는 기관이 정신활동 중추라고 배워왔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생각 즉 사고, 정신활동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기억하는 것? 판단하는 것?
아니면 그런 종류의 복합활동?

머리가 아플때, 우리의 생각이 끊기는가? 오히려, 통증을 느끼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생각은 방해를 받는 수준이다. 결코 생각의 흐름을 막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생각이라는 것은 어떤 신체기관과 연결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흔히 뇌의 어느 부분이 이상이 생겨 지체 장애가 생기고, 언어나 발달 장애가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라는 것은 정신 장애인도
하는 것이며, 결코 신체 어느 부위와 연결시켜 이해하지 않아야한다는 것이다.

생각은 자극에 독립적이지만 이것은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독립성을 띄기 어렵게
된다. 가슴으로 생각하는 방법이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을 넘어
자극과 독립하여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다면, 가슴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아니라
발톱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며, 떨어진 머리카락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리라...

졸리우기 때문에 생각이 멈춘다는 것에서는 아직 생각을 덜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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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5.10. Fri.

1. Application 프로그래밍은 단지, 여자친구를 만나, 커피마시고, 영화보는 수준이다.

2. Kernel 모듈, Device Driver 프로그래밍은 섹스하는 느낌처럼 짜릿하다.

Embeded는 로보트와 하는 기분일걸... 사실안해봐서 모르겠다.

3. 흐름이 명쾌하며, 예외가 제대로 처리되고, 리소스의 생성소멸이 쌍을 이루는 코드는 제법 섹시한 프로그램이다.

4. 뭔가 Polling하는 소스가 상당히 빠른 주기라면, 수다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치 여고 동창회가 있는 음식점 구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랄까..

5. 포인터 없이 커다란 객체가 copy되는 모습은 언젠가는 끊어질듯한 밧줄다리를 코끼리 타고 넘어다니는 기분이 난다.

6. const 없는 인자를 갖는 함수를 호출하면 뭔가 항상 뭔가 도둑맞는 느낌이든다. 바뀐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7. 주석, cpu는 모르는 우리들만의 언어.

8. Warning, compiler의 훈수. 때로 우리는 무시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9. header의 선언문 하나하나를 이해할수있는 당신, 떠나라. 그리고 세상을 야리면서 하는말. 따라올테면 따라와봐.

10. STL 컴파일 error를 이해한다는 것은, 신성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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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2005.10.31 17:33 신고

    이런... 너무 멋진 글이잖아요!

  2. 주인 2005.11.02 16:05 신고

    자그마치 3년전에 쓴 글이군요. 그런데 누구신지..

2002.5.8. Wed.

같이 일하는데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가 통하는데 있다.
아무리 의견이 달라도 그들은 같이 일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서로를 자신에게, 또한 자신을 그들에게 맞추면 되기 때문이다.

언어가 통하는 것은, 단지 문법적으로 맞는 말을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이 일하려는 마음만 잃지 않으면 된다. 아니, 더 잘하려는 노력만 있으면
된다.

일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그들의 일하는 수준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월등히 잘한다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게 둘이 비슷하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좀더 겸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김동성스러운가..?)

같이 일한다는 것은, 혼자 일할때보다 나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명심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린 같이 일할 필요가 없다.
같이 일한다는 것은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점이 없다면, 그런
사람과도 같이 일하는 법을 배우자.

남과 같이 일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는 일이다.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이것을 사실로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의사소통을 하는 언어가 통하는
첫걸음을 디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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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14. Wed.

냉소컨셉이라는 것은 세상을 비웃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를 비웃는 것이다.
컴퓨터를 비웃는다는 것은 지엽적으로는 웹링크를 쫒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는
로봇을 비웃는 것이며, 조금 더 나아가면, 그 로봇을 만든 프로그래머를 비웃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 컨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면 홈페이지 전반에 약간의 냉소적인 말투가 배기
마련이며, 정작 당사자인 로봇은 그 냉소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가는 것임을 볼
때, 냉소컨셉은 로봇을 향해있지만, 정작은 이 사이트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내가 이 사이트를 방문하는 사람에게, 냉소를 던지는 이유는, 어쩌면 현재의 내
기분이 그런 상황의 연속이기 때문이며, 받은 자극에 대한 일말의 분출구로서 홈을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 전반이 이런 모습이 아닐거라는 거 알자나?

누군가를 비웃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상대의 능력에 대한 무시에 근거한다. 이것은
또한 자기 과시욕과 연결되어, 자기정체성을 세상에 표현할 때, 초기에 발현되는
초보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이 초보적인 행위는 그 사람의 도덕성(Morality)의
성장과 더불어, 두번째 단계인 마음으로는 비웃지만, 얼굴에서 교묘히 감추어지는
단계에 이르게 되며, 세번째로는 비웃을 이유조차 느끼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냉소컨셉은 누구를 비웃든 냉소하는 주체의 현재 상태가 혈기에서 표출되는 것이며,
나의 경우 젊음이라는 미명(美名)하에 용서받기 원하는 소극적인 자기표현인셈이다.

좀 비웃으면 어때?
누군가 이런 페쥐하나쯤 만들어도 괜찮은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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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처형 2006.01.20 12:51 신고

    비웃으면 안되쥐~
    황금율~
    know your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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