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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과 얘기하다가 오래된 생각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수학공식집에 대한 얘기인데,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들은 대개 그때즈음 자기만의 수학 공식집같은 것을 만들어 정리하기도 한다. 그런 행위의 백미는 자기만 아는 공식을 발견하였을때이지 않을까 한다. 나도 공식집은 있었지만, 아마 두껍게 될 때까지 쓰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당시에 공식집이 딱히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나만의 공식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원리를 다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고, 결국 비슷한 패턴의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정도 아닌가? 이렇게 공식을 찾아 헤메는 습관은 메타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여러 문제를 패턴화하고 패턴화된 문제들의 변형을 음미하는 것이 공식이 주는 즐거움이다.


이런 생각을 굉장히 현학적인 글로 쓴 책이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이있다. (늘 상권만 읽고 멈추게 되더라는...ㅎㅎ)



괴델 에셔 바흐(상)(까치글방 150)

저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지음
출판사
까치 | 1999-07-0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크레타의 철학자 에피메니데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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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뭏든 간에, 이런 추상화된 레벨에서의 사고가 주는 유익은 직관인데, 인과관계를 따지지 않고 바로 원인과 결론에 대한 감을 잡는 일 아닌가? 서로 달라 보이나 그 상위 생각이 비슷한 것을 골라 낼 수 있는 훈련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오래된 생각이며, 지인과의 대화 중에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은, 직관의 영역이 작품에 대한 감상의 영역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막연한 생각이다만 조금 정리하자면, 감상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감상하는 사람의 내면을 자극하여 축적된 내면의 감수성을 의미 있는 순서대로 깨워내는 것.


인간의 감수성이 풍부해진다는 것은 마치 풍경을 여럿 걸어 놓은 처마처럼 바람이 불어 올 때 바람에 따라 흔들릴 종을 매달아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감수성이 메말라 있을 때는 어떤 작품을 보더라도 흔들릴 종이 별로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면된다.


직관과 감수성은 해석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자극의 인과관계를 당장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느끼는 그대로의 패턴에 따라 내면이 자극되는 것이며, 그에 따라 정신세계에 가득한 종들이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들어온 일차의 자극이 그간 경험해 온 비슷한 패턴의 경험들이 같이 살아나는 것이다.


수학의 공식집을 만드는 것은 문화의 소비를 풍성하게 만드는 훌륭한 작업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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