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들어 가기전의 기억은 몇개 없다.
태어난지 6년이라는 시간동안의 기억이 단 몇 컷이라니,
정말 컷으로밖에 기억되지 않는 순간만 흑백으로 들어 있을 뿐이다.
내 어릴 적 사진으로부터 기억과 분리해서 적기란 힘든 것이다.
지금 적는 것은 사진으로 갖고 있지 않는 기억들이다.
사실 어릴적 사진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기억하는지, 원래 기억하고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 동생 수술 받아 입원해 있는 날, 아버지는 손수 밥을 하셨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시고...
* 어느날, 부산에 살고계시는 (현재는 부천에 사시는) 고모부께서 장난감 탱크를 사오셨다.
그놈은 뿅망치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는 윗부분을 치면 실제로 플라스틱 포탄이 앞으로 나가는 위력적인 장난감이다.
* 동생이 팔에 화상을 입었다. 재진인지 인선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 동생이 변을 잘 못보는 것 때문에 관장을 했다. 재진인지 인선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박정희가 죽었다는 신문을 보았다. 누군지는 몰랐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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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통해 도움을 요청할때, 최근의 서비스는 지능적인면이 있다.

''' "지금은 전 상당원이, 통화중이오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이런 것은 어떨까?

''' "당신은 지난번 통화때, 75번 상담원과 통화하셨습니다. 현재 75번 상담원은 통화중오니, 대기하시려면 1번을 다른 상담원과 연결을 원하시면 2번을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

프라이버시 문제가 생길 수 있을까?
구내 전화의 경우 외부로 나가는 모든 발신자 전화번호가 같을 수 있으므로, 조금 효용이 없겠구만.
그렇다면, 시작번호가 이동전화 번호라든지, 별정통신 사업자가 아닌 식별번호일 경우에만 저장할 수 있는 옵션을 가진다면,
ARS 시장에 도움이 될 것도 같은데 말이지...

없다면.. 누가 만들려면 만들던가...
에잉.. 나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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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27. Wed.

이글은 사람이 어떻게 욕심을 부리게 되는가에대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어린아이를
키우다보니 신기한것중 하나는, 배고플때 젖을 물리면 먹고 싶은 양 이상은 먹지 않는
것을 보았다. 정말 단순하지만, 이 아이가 언제부터는 자기가 먹고 싶은양 외에도 더
먹는 날이 올 것이다. 아까워서, 또는 맛있어서. 어떻게 그런 변화가 생기는 걸까.
누가 그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라는 암시를 주었을까?

생명이라는 것은 자극을 받으며, 외부 세계와 통신을 하게 된다. 그 상황의 다양한
반복이 자기 존재와 생명이라는 본능과 연관되어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자극에는
다음 세가지의 경우가 있을수 있는데, 이는 생명이 처하게 되는 기본적인 상황이다.

첫째로는, 자극이 없는 상황인데, 사람이 자극이 없다보면, 아마 죽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것은,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며, 그것은 본디 관계를 통해 자기를
알아가는 샘명 현상의 기본적인 능력을 거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적당한 자극이 있는 상황이다. 적당한이라는 말이 참 애매한데, 인간은 그
자극을 느끼는 어느정도의 한계가 있으며, 그 이하는 자극이라하지 않고, 그 이상은
무리한 자극이라 한다. 이 한계를 역치라하며, 역치는 성장하면서 늘어 나는
것이며, 그 역치 정도에서 받는 자극은 "일상"이라는 말로 표현 된다.

세째는, 과한자극을 말한다. 위에서 말한, 역치이상의 자극이며, 의식, 무의식적으로
역치이상에 대한 자극이 모여, 성장하게 된다. 아이가 걸을 수 있게 되기까지 수많은
역치이상의 자극에 대한 경험이 바탕이 된다.

이 세 가지 경우를 보건데, 성장이라는 것은 과한자극이 조금씩 쌓여 생명을 강하게
만들고, 강한 자극 속에는 일부, 성취감과, 어떤 만족이 수반되므로 즐거움으로 남게
된다. 이때, 과한 자극의 한계를 우리는 두려움이라 부른다. 적당한 자극만 있는
일상을 벗어나, 과한 자극이 주어 지지만, 그 과한 자극의 어느 정도에 대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며, 이는 뇌리에 두려움이라는 경험으로 존재하고, 이는
자극 받는 방법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남게 된다.

어릴때에는 적당한 자극에 대한 역치가 너무 낮아, 어떤 조그만일을 해도 과한
자극에 대한 경험이 되며, 성인 봤을때는 늘 모험하며 지내는 삶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과한 자극은 이렇듯 성장을 수반하면서 동시에 두려움에 대한 경험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두려움. 이는 생명으로 하여금, 미래를 준비하게 만든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현재 필요한 것이상을 소유하도록 의지를 발동시키며, 여기에서 의지의 역치가
과도한 의지에 의해 늘어 나게 되고, 이를 우리는 욕심이라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탐닉이라는 것은 그 근본이 두려움에서 출발한 "미래대응의지"를 잊고, 두려움과는
상관없이 자극에 대한 역치 이상에서 즐기는 상황을 말한다.

자극은 인간이 느끼는 모든 일차적인 외부의 정보이며, 인간의 지능은 이 자극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하는 정보체계에 의해 반응하는 복잡한 이성체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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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3.28. Fri.
가슴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부터 머리로 생각한다는 개념이 보편화되었을까?
과연 생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정신적 활동은 육체의 자극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또는 그 반대는 어떤관계에 있을까?

이 생각의 시작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미이라를 만들때, 코를 통해서 뇌를 빼낸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 이유는 그들 문화에서는 생각하는 위치가 가슴이라고 여기는 데
있다고 들었다. 그말이 사실이건 거짓이건간에,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했으며,
당장에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생각하는 기관이라고 알고 있는 집단을 상상했으며,
그런 문화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를 즐거운 상상쯤으로 사유해보았다.

그 뒤로 시간이 날때마다, 가슴으로 생각해보려고 했으며, 심지어는 머리가 아닌
손가락 끝으로 생각을 해보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당히 어렵다.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려는 생각조차 머리에서 일어난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머리로 생각한다는 보편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이 혹시 우리의
가장 큰 외부 기관인 눈과 귀가 머리에 붙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아니면,
뇌라는 기관이 정신활동 중추라고 배워왔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생각 즉 사고, 정신활동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기억하는 것? 판단하는 것?
아니면 그런 종류의 복합활동?

머리가 아플때, 우리의 생각이 끊기는가? 오히려, 통증을 느끼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생각은 방해를 받는 수준이다. 결코 생각의 흐름을 막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생각이라는 것은 어떤 신체기관과 연결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흔히 뇌의 어느 부분이 이상이 생겨 지체 장애가 생기고, 언어나 발달 장애가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라는 것은 정신 장애인도
하는 것이며, 결코 신체 어느 부위와 연결시켜 이해하지 않아야한다는 것이다.

생각은 자극에 독립적이지만 이것은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독립성을 띄기 어렵게
된다. 가슴으로 생각하는 방법이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을 넘어
자극과 독립하여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다면, 가슴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아니라
발톱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며, 떨어진 머리카락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리라...

졸리우기 때문에 생각이 멈춘다는 것에서는 아직 생각을 덜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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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5.10. Fri.

1. Application 프로그래밍은 단지, 여자친구를 만나, 커피마시고, 영화보는 수준이다.

2. Kernel 모듈, Device Driver 프로그래밍은 섹스하는 느낌처럼 짜릿하다.

Embeded는 로보트와 하는 기분일걸... 사실안해봐서 모르겠다.

3. 흐름이 명쾌하며, 예외가 제대로 처리되고, 리소스의 생성소멸이 쌍을 이루는 코드는 제법 섹시한 프로그램이다.

4. 뭔가 Polling하는 소스가 상당히 빠른 주기라면, 수다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치 여고 동창회가 있는 음식점 구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랄까..

5. 포인터 없이 커다란 객체가 copy되는 모습은 언젠가는 끊어질듯한 밧줄다리를 코끼리 타고 넘어다니는 기분이 난다.

6. const 없는 인자를 갖는 함수를 호출하면 뭔가 항상 뭔가 도둑맞는 느낌이든다. 바뀐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7. 주석, cpu는 모르는 우리들만의 언어.

8. Warning, compiler의 훈수. 때로 우리는 무시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9. header의 선언문 하나하나를 이해할수있는 당신, 떠나라. 그리고 세상을 야리면서 하는말. 따라올테면 따라와봐.

10. STL 컴파일 error를 이해한다는 것은, 신성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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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2005.10.31 17:33 신고

    이런... 너무 멋진 글이잖아요!

  2. 주인 2005.11.02 16:05 신고

    자그마치 3년전에 쓴 글이군요. 그런데 누구신지..

2002.5.8. Wed.

같이 일하는데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가 통하는데 있다.
아무리 의견이 달라도 그들은 같이 일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서로를 자신에게, 또한 자신을 그들에게 맞추면 되기 때문이다.

언어가 통하는 것은, 단지 문법적으로 맞는 말을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이 일하려는 마음만 잃지 않으면 된다. 아니, 더 잘하려는 노력만 있으면
된다.

일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그들의 일하는 수준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월등히 잘한다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게 둘이 비슷하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좀더 겸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김동성스러운가..?)

같이 일한다는 것은, 혼자 일할때보다 나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명심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린 같이 일할 필요가 없다.
같이 일한다는 것은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점이 없다면, 그런
사람과도 같이 일하는 법을 배우자.

남과 같이 일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는 일이다.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이것을 사실로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의사소통을 하는 언어가 통하는
첫걸음을 디딘것이다.
신고
2002.2.14. Wed.

냉소컨셉이라는 것은 세상을 비웃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를 비웃는 것이다.
컴퓨터를 비웃는다는 것은 지엽적으로는 웹링크를 쫒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는
로봇을 비웃는 것이며, 조금 더 나아가면, 그 로봇을 만든 프로그래머를 비웃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 컨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면 홈페이지 전반에 약간의 냉소적인 말투가 배기
마련이며, 정작 당사자인 로봇은 그 냉소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가는 것임을 볼
때, 냉소컨셉은 로봇을 향해있지만, 정작은 이 사이트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내가 이 사이트를 방문하는 사람에게, 냉소를 던지는 이유는, 어쩌면 현재의 내
기분이 그런 상황의 연속이기 때문이며, 받은 자극에 대한 일말의 분출구로서 홈을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 전반이 이런 모습이 아닐거라는 거 알자나?

누군가를 비웃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상대의 능력에 대한 무시에 근거한다. 이것은
또한 자기 과시욕과 연결되어, 자기정체성을 세상에 표현할 때, 초기에 발현되는
초보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이 초보적인 행위는 그 사람의 도덕성(Morality)의
성장과 더불어, 두번째 단계인 마음으로는 비웃지만, 얼굴에서 교묘히 감추어지는
단계에 이르게 되며, 세번째로는 비웃을 이유조차 느끼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냉소컨셉은 누구를 비웃든 냉소하는 주체의 현재 상태가 혈기에서 표출되는 것이며,
나의 경우 젊음이라는 미명(美名)하에 용서받기 원하는 소극적인 자기표현인셈이다.

좀 비웃으면 어때?
누군가 이런 페쥐하나쯤 만들어도 괜찮은거 아냐?
신고
  1. 일처형 2006.01.20 12:51 신고

    비웃으면 안되쥐~
    황금율~
    know yourself?

2002.2.4. Mon.

난 꽤 논리 정연하고, 잘 이해되는 말로 된 생각을 좋아한다. 그것은 아마 생각을
하다보면 늘 그렇게 되는 "결론 없는 사유"에 대한 싫증이지 않나 생각된다.
논리가 정연하다는 것은, 모든 가능한 상황을 고려해서, 빈틈을 주지 않는 결론을
도출한 상황에 이른 것이라 정의하고 싶다. 그것은, 내가 프로그래머이기 때문에
흔히 갖게 되는 직업상 얻은 병(?)이라고 할 수도 있다.

논리와 직관의 문제에 있어서, 직관은 새로운 논리를, 또는 기존 논리의 빈틈을
발견하는데 도움을 준다. 따라서, 논리적인 사람만이라 할 수 없고, 직관적인
사람만이라 할 수 없다.

과학과 수학의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과학은 "가능한" 모든 현상에 대해 수학의
논리를 빌린 것일 뿐, 생각할수 없고, 관찰되지 않은 모든 현상까지에 대해 수학의
논리를 빌린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학이라는
것이 자연세계를 벗어나, 인문, 사회, 경제 등의 전반에 사용되는 것은, "가능한"
모든 현상에 대해 수학의 논리를 빌렸기 때문이다. 수학의 논리란 산술식이 아니라,
가정과 증명을 통한 결론에 이르는 길을 기초부터 차근차근 세운 하나의 조직적인
거대한 산처럼 쌓여진 체계를 말한다.

내가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비슷한 조류를 통하여, 내가 담고 있는 조직에서도
사람들은 과학적 사고방식을 통하여, 서로 대화하며, 교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내가 속해있는 조직만의 특성이 아니다. 사회적인 현상일 뿐.

누구든지 조직에 문제가 있음을 느낄 때는, 직관이 작용하는 것이고, 논리가 뒤따라
그 결론을 내고자한다. 그 결론이 힘 밖에 있는 것일 때, 그는 조직을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 대한 "가능한" 모든 현상이 파악되고, 그것에 대해,
검증된 사실 위에서 해결책으로서의 논리를 제시하며, 그 논리를 조직에 강하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만이, 리더로서의 자격을 가진다. 그 리더쉽이란, 그가 처한
위치에서 "가능한" 모든 논리를 제시하고 적용할 때 "발휘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그런면에서 실패한 사람일까? 포기하려는 마음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조직을 오래 보아온 탓일까? 새로 들어 온 사람들의 의기양양함과 포부는
지금껏 있어온 나에게는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들이 무모한
것이아니라, 내가 무능한것을 뜻할 지도 모른다. 나는 과연 가능한 모든 방법에
대해 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고 포기하는 것일까? 재밌는 게임은 과연 어디에 숨어
있을까? 내가 살기 위한 방편으로써 몸부림친뒤에 내린 결론이 과연 조직의 이탈이란
말인가?

일은 많이 하는 사람에게 계속 돌아가기 마련이다. 조직의 20%가 나머지 조직을
살린다는 말은 어쩌면, 우리같은 규모에서는 적용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조직의
20%는 단지 사람 수의 20%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엉성한 조직의 시스템 깊숙이
숨겨 있는, 그 조직 누구도 그 시스템 전체를 알지못할 경우, 그 조직이 하는 모든
행위의 20%만이 그 조직의 성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 될 수 있다.

내가 힘들어 하는 이유는 아마, 너무 정교한 시스템, 너무 완벽한 조직을 꿈꾸기
때문일까? 너저분하게 늘어 놓은 사업 아이템을, 아무도 완벽한 지휘를 꿈꾸지 않기
때문일까? 내가 지친것은, 규격화되지 않은 일처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지고 있는 프로그래머이기 때문에 갖게 된 직업상 얻은 병때문에, 논리적인
방식의 조직흐름이 없는 것을 내 온몸이 조금씩조금씩 거부해 온 것이다.
그 거부감이 때로는 업무표준화를 위해 문서를 만들기도 했고, 사업주체에 대한
정체성을 갖고자, 팀 업무를 다시 정하자는 회의를 마련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에게
나의 이런, 느슨한 조직에 대한 거부감을 말한것은 아니다. 나조차 몰랐으니까.

이제 말할 수 있다. 내가 꿈꾸는 조직에 대한 지휘권이 내게 없거나, 그
지휘권자에게 내 의견이 관철되지 않는 것이, 내 직업병적 사고방식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조직을 꿈꾸며, 조직의 수장자리에 앉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그를 그자리에 앉혀 놓았거나, 돈벌 생각이 그 자리로 인도
했을 것이다. 재미없다. 그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가능한" 모든 현상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지엽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체질이기 때문이다.
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조직 리더쉽에 대한 꿈을 기르고 있는 중일 뿐. 여기는
아니다.
신고
2002.2.1
느리게 걷다보면, 사람들이 모두 뒤통수를 내게 보이며 앞으로 사라져 간다.
그걸 눈을 약간 게슴츠레하게 뜨고 보면, Motion Blur된 모습으로,
하나의 전위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흡사, 우주를 배경으로한 비행기 오락에서 피해야할 탄환을 보는 착각을 부른다.
내가 볼 수 없는 것은, 내 뒤에서 나와 같은 속도로 오는 사람이나, 더 느리게 걷는 사람이다.
내 앞을 지나는 무리들은 정말이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염색한 색깔도 다르고, 입은 외투도 다르며,
들고다니는 가방 모양도 다르고, 심지어 스타킹도 모두 다르지 않은가?
따라서 어떤 사람은 눈길을 끌고, 어떤 사람은 평범하다.
아마 나 또한 누군가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느리게 걷다보면, 시간이 느려진 것 같고, 난 마치 시간의 속도를 지배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총알 같은 시간, 바쁜 모습.. 내 도피해야할 1 순위가 아닌가 싶다.

너무 빨리 늙고 있다. 너무 빨리 지나가므로,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
인생을 두 번 살 수 없는데, 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기만 할 뿐 그처럼
살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느리게 걷다보면, 고소할 때가 있다. 한참 전에 본 사람이 아직 기다리고 있기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지. 그 사이에 난 주위를 자세히 살펴 보았으며,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마저 세밀히 느꼈기 때문이지. 저 건물은 어떤 모양의 창이 있고, 간판은
세로로 붙어 있는게 어울리는지, 보도블럭은 내 걸음으로 몇 걸음이나 되는지, 난 좀 더
내게 다가오는 세상을 느끼고 지나왔다는 때문이지.

내가 느리게 걷는 가장 큰 이유는, 생각할 때 제일 좋은 방법이 느리게 걷는
걷이라는 경험에서 나온 습관이기 때문이다. 아마, 눈에 적당한 속도의 자극을
주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천천히 걸을 때는, 가장
감성이 풍부해지고, 가장 상상력이 풍부해지며, 가장 결단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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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느린신문 2007.12.29 10:24 신고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공감이 가는군요. 님과 같이 느리게 살고 싶은 분들과 함께하는 느린신문이 2008년 1월 1일 조촐하게 창간됩니다^^ 우리 2008년에는 더욱더 느리게 살도록 노력해요.

    느리게 살자! 느린신문 http://www.nre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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