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더 가기전에 알파고가 던져준 생각들을 정리해야할 것 같다.


난 스포츠에 관심없기 때문에, 국가대표 대항전이라도 보지 않는다. 이세돌에 관심은 있지만, 바둑을 잘 모르기에 바둑 소식을 따라가지도 않을뿐더러, 그의 경기를 찾아 보는 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경기만큼은 이세돌이아니었어도 봤을 것은, 인공지능이 전개하는 수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몬테카를로 기법에서 어떤 발전을 이뤄서 만들었을까를 고민하고 싶어서였다.


완전 계산 불가능성의 영역에서 최대한 휴리스틱한 판단을 내리는 것. 게임의 규칙은 행동의 바운더리를 규정한다. 바운더리가 없는 게임에 대한 혹은 바운더리가 확장되는 게임에 대한 판단에서 과연 인간이 정한 규칙외에 최적의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를 고민해보는 것은 꽤 괜찮은 자극아닌가?


그런면에서 중간단계로 바둑은 게임의 규칙이 다른 것보다 훨씬 바운더리가 큰 (그러나 확장은 되지 않은) 게임이다.


직관이란 모든 수를 다 계산하지 않고 그간의 경험에의한 패턴을 통해 내리는 결정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수학 문제를 풀 때도 직관을 사용하려면, 수많은 패턴의 문제를 풀어봤을 때 가능한 것이며, 그런 직관의 사용은 인간이 어떤 일을 수행하든 사용되는 방법이다. 게임에서의 직관이란 그동안의 학습패턴에 의해 행동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인공신경망을 사용하든, 마르코프 체인을 사용하든, 유전알고리즘을 사용하든 그 학습 결과의 내부에 형성된 데이터를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있나? 내가알기론 없..) 인간도 알 수 없는 학습된 내부 데이터. 중요한 것은 학습에 사용된 패턴과 정답셋, 학습한 순서, 그리고 시스템의 초기값정도이다.


난, 뭘하고 싶은 것일까?


시스템 콜들의 나열을 어플리케이션 프로그램이라 보면, 인공지능은 적절한 순서를 찾는 것으로 원하는 기능을 스스로 할 수 있는 S/W를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어떤 것을 기계라하고, 어떤 것을 영혼이라할 수 있을까 (공각기동대의 표현을 빌어서 하자면 말이다)


의사 결정이라는 것은 최상위 레이어에서일어나는 일이며, 하위로 내려오면 정확한 기능을 해야한다. "어제 찍은 사진들의 파일을 장소별로 분류해"라는 최상위 의사결정이 있을 때, 가장하위에서는 파일의 날짜와 Geo tag를 추출하는 것, 장소별 디렉토리를 만드는 것, 파일을 이동하는 것이며, 중간에서는 어제 날짜를 판단해야하고, 장소들의 유사 군집을 분류하는 작업이 들어가야한다. 하위 명령은 정확한 기능으로 시스템콜이 존재한다. 그 시스템콜을 적절한 순서로 나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중간 레벨이 존재하고, 그 중간레벨은 최상위 의사결정에 복무한다. 이런 작업을 매일 한다면, 이 전체 기능이 하위 기능으로 높은 의사결정에 부속이 될 수 있다(예를 들어 "여행 리포트를 작성해"라든지).


위 작업에서 학습이라는 인공지능의 요소가 작용해야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 아니, 과연 정답셋을 고려한 피드백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훔.



'연속적이다'라는 말은 모든 점에서 양방향 변화의 수학적 미분값이 같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감성과 이성을 포함하여)이 측정가능한 모든 영역에 대하여 1계 미분에 대하여 연속성을 갖는다면 그 주위 의식과 조화(?)로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어떤 의식들이 조화로운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면, 측정가능한 모든 영역에 대하여 도함수의 각 점의 극한값에 대한 함수값이 같다. 내가 어제의 나와 같은 존재라면, 내가 생활하는 영역에서 주위와의 관계에 대해 특이점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점에서 양방향 미분값을 일치시키면된다.


조니뎁이 연기한 트랜센던스에서 의식이 컴퓨터 안으로 옮겨질 때를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영화의 그런 모티브는 참 좋으나, 양자컴퓨팅까지도 봐줄만하지만, 나노 공학이나 바이러스가 나올때 급격히 몰입감이 떨어진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미분값에 불연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P.S. 그나저나, 케이트 마라(Kate Mara)는 악역인지 선역인지 구별안가는 배역에 적합한 외모인 것 같다. (매력적이다) 케이트 마라는 마션에서도 나오더만. 관심이 가는 배우.

말할 때, 어떤 주제로든 어떤 깊이로든 내 한계까지 드나들 수 있는 상대는 놓치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 친구를 잃어간다면, 그것이 슬픈일일뿐.

목소리를 내는데 사용되는 근육과 그 kinetics에 관심이 계속 있다. 언젠간 잉여로울 때,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만, 그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오늘도 한참을 Oral muscle 자료들 보고, 의학 동영상들을 보니 다시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 만. 언제나 실행할까는 나도 미지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네.


이해와 익숙함.


고급 수학이나 물리학을 하다보면, 이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저 단순하게 익숙해지면 의심하는 법을 잊게 된다. 아무리 미분적분이라도, 푸리에 변환이라도,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상태로 어설프게 문제를 풀어 본다. 또 풀어 본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해되는 것일까 익숙해지는 것일까? 익숙해지면 이해되었다는 신경을 건드리는 것 아닐까? 미분적분이 아니라 선형대수, 동역학, 양자역학이 오더래도 비슷한 방식으로 지식을 쌓아 올라간다. 비단 수학,과학뿐이랴, 세상의 어떤 배움도 이해와 익숙함으로 구별한다면, 그 용어들이 주는 깊은 성찰 보다 용어들로 만들어진 거대한 논리 체계에 그저익숙해질 뿐이다.


처음 이론을 제안한 사람은 정교하게 (혹은 익숙한 표현을 빌어) 자세하게 설명을 한다. 그러나 학습자들은 그 이론을 어떻게 제안할 수있었을지 의구심을 갖는 것보다는 논리 자체를 이해하는데 급급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그 이론이 없던 시절과 그 이론 이후에 생기는 변화에 대한 것은 감지하지 못한 채 최종 산출물만 알게 되는 것이다.


익숙함을 굳이 이해에서 출발할 필요도 없다. 이해 없이 익숙해지는 것이 인간이 태어나서 학습하는 기본 방식이니까. 익숙함이란 무지와 앎 사이 어디쯤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 시작은 완전 새로운 것이 아닌 그 동안 알아왔던 다른 앎 패턴에서 건너와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만들 지식 체계는 이런 구조를 띄고 있어야하지 않을까?




자본주의 사회속에 기거하면서, 어떻게든 살아야하고 사는 문제에 시간을 들이다보면, 정작 집중하고 싶은 우주와 인간의 내면에 대해 소홀하기 쉽다. 틈틈이 우주와 인간의 문제 혹은 그것에 기반을 둔 현실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긴 하다. 그런 두 종류의 시간 사용이 긴장 상태를 이루고 그 상태를 참을 수 없어 해 오다가 이제는 무덤덤하게 그 긴장 속에서 시간을 충실히 사용하려고 한다. 충실히 사용한다는 것은 이런 긴장 상태에 있을 때를 돌아보건데 쓰잘데기 없이 해결되지 않는 상태로 빠지지 않는 것, 그 상태에 대한 푸념을 다른 이에게 전하지 않는 것, 그저 그 모든 것을 관조하며 돌아보는 것으로, 그러한 것이 '나'라는 생각을 하고, 받아들이기로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느 하나에 고착되는 것이 두려워, 나는 자유인이다 선언해왔다. 그것은 내가 나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실제로는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조차 노력할 것이다) 판단의 기준에 대한 자유를 말한다. 다른 이 아니 정확히는 내 것이 아닌, 나에게 주어진 시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구속으로 보고, 내가 판단의 주인이 되는 그런 자유를 말한다. 그러나 그런 자유를 이용하는 것에는 늘 조심스럽고, 유혹적이기까지 하다. 어쩌겠나, 난 급진적이지 않고, 조심스러운 사람인데.


2016년은 지금 12월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2015년도 2014년에 생각하는 그런 해는 아니었으니까. 더 이상 새해를 계획하지 않는다. 그저 달릴 뿐이다. 살아낼 뿐이다. 순간순간 선택할 뿐이다. 여전히 우주와 인간에 대해 고민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미래를 받아들이겠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삶의 고갱이를 그저 붙잡고 그로 연역된 생활을 할 뿐이다. 의식의 타히티에서 그저 그렇게.

인간의 신체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아닌 제6감, 영적인 눈, 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평가하는 일차 기준은 그런 감각이나 경험을 주위 사람과 후대에게 물려 줄 수 있는 합리적 설명이 가능한가이다. 그 설명에 공감하는 수준의 사람들을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으로 이해되려면, 그 설명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토의를 진행해가며, 설명의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어야한다. 그렇게 해도, 모든 설명은 완벽할 수 없다. 완벽하지 않은 설명이라할지라도 그것이 갖춰야할 최소한의 조건은 "합리성"이며 "객관성"이다. 


그 다음엔 세대를 걸쳐 살아 남는 설명이어야한다. 이것은 마치 진화가 동작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어떤 국지적인 환경변화에 적응하여 살아남은 개체가 자신의 형질을 후세에 물려주는 것처럼, 그 설명 또한 많은 상황에서 인용되며 지속적인 보완이 이루어져야한다. 또한 과거에 박제되어 멈춰있지않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상황을 유지하여야 그 합리성과 객관성이 유지된다.


합리성이란 무엇일까, 합리성을 논의하기 전에 언어가 가지는 전달도구로서의 기능을 얘기하자면, 단어는 어떤 개념을 대표한다. 그 개념이 두 화자사이에서 일치함이 전제되지 않으면 전달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 개념들은 서술의 구조속에 녹아들어 있고, 서술은 화자들이 선행하여 습득된 개념을 일련의 순서대로 되살려내는 방식으로 그 전달기능을 수행한다. 합리성이란 그런 선행되는 개념이 되살아 나는 방식에 모순이나 모호함이 없음을 뜻한다.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의 말이 대표하는 선행개념들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서술이 전개되는 것을 말하며, 이차적으로 그 말에 대한 개념이 서로 일치하더라도 서술에 모순이나 모호함이 제거되지 않은 채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대화는 종종 이런 합리성이 제거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진행되어가다 수위를 넘는 순간 멈추게 된다. 심지어 말하는 사람은 자신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생각한다. 여기서 합리적이지 않음에도 합리적이라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은 일반적인 사회현상이나 과학현상의 설명에서 보다 신적인 영역의 감각이나 경험을 설명할 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영역을 설명할 때 더 그러하다.


아, 지겹다.


이것이 어떤 범주에 드는 생각인지 잘 모르겠으나 생각이 더 진전되기 전에 기록을 해두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병마개는 오른쪽으로 돌리면 잠기며, 왼쪽으로 돌리면 열린다. 다른 말로하면, 오른쪽으로 돌리면 병마개는 아래로 진행하고, 왼쪽으로 돌리면 위로 진행한다. 이것은 나사못을 돌릴 때도 마찬가지이며, 선풍기 날개를 제외한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나선 홈이 있는 원통 구조체가 가지는 표준(?)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방법을 헷갈릴때가 있는데,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 있는 나사, 특히나 책상 밑부분에 위로 박혀 있어서 손을 한 번 꺽어서 돌려야하는 곳에서는 늘 한 번 생각하게된다. 물론 그 나사가 쉽게 돌아가는 상태라면 양쪽으로 돌리다보면 헐거워지는 방향으로 또는 조이는 방향으로 원하는대로 돌릴 수 있지만, 힘을 줘야하는 경우에 혹시 잘못 돌리지 않았나 하면서 생각하게되는 순간이 있다. 이 때, 내 경험상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일단 눈으로 보면서 손으로 풀거나 조이는 동작을 한다. 허공에 대고 계속 손동작을 반복하면서 보이지 않는 그곳에 있는 나사에 손을 가져가서 나사를 돌린다.

둘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먼저 확인한다음 나사가 박힌 위치는 처음 상황과 비교해서 위아래를 뒤집은 상태임을 인식하고 그 방향을 바꾸는 방법으로 나사를 돌린다.


이 두가지 방법 중 하나가 동원되어야할 상황이 올 때마다 생각난다. 몸이냐 머리냐 그것이 문제로다.




  1. blueboh 2016.01.04 14:56 신고

    여긴가

  2. blueboh 2016.01.04 14:58 신고

    댓글 화면 이상해..너무 커

어떤 상황을 설명할 때 과학적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을 소설에서 발견하면, 소설의 재미마저 급하게 떨어진다. 사실주의 시각을 잠시 내려 놓는 일이 이리 어려울 줄이야.

스토리에 집중해야하는 윤소라의 소라소리 같은 팟캐스트를 들을 때도, 내용에 집중해야하건만 으레 그렇듯 난 딴 생각이 든다. 정확히는 내용을 따라가는 의식과, 또 다른 딴 생각 의식이 동시에 진행된다. 오늘 든 딴 생각은 이렇다. 소리는 귀로 감지하는 연속적인 공기의 진동일 뿐이지만, 인간이 내는 목소리는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시간에 따라 실리게 되므로, 단순한 진동이 아닌 것이다. 귀는 소리의 주파수(20Hz~20kHz) 별로 감지하는 영역이 다르다고 알려져있는데, 어느 순간의 목소리는 여러 주파수가 섞여 있으며, 각 주파수는 귀의 다른 영역을 각각 자극하고, 귀에서는 각 부위가 동시에 정보를 받아 하나의 패턴을 이루며, 그것이 시간에 따라 연속적으로 변하는 것을 목소리라 한다.


이러한 시간에 따른 공기의 진동 변화에 감정이 실리고, 의미가 실린다. 그런 소리를 받아서 기존에 학습된 패턴중에 제일 큰 진동을 일으키는 패턴이 소리 회상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의미를 부여받게 되고, 시간에 따라 부여되는 의미 열이 또하나의 패턴이 되어 또다른 의미 회상과정을 통해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하게 된다. 여기서 소리회상과 의미회상은 전적으로 지금 만든 말이므로 크게 전문성에 구애받지 않기로 하자.


경험했다라는 것은, 과거 어느 때 대상을 인식한 적이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결코 인식한 적이 없는 것을 회상해 낼 수 없다. 어떤 구체적인 경험이든 추상적인 심상이든 그것이 한 번 의식 속에서 자리를 잡은 과정이 있어야만 다시 회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국어를 학습할 때도 마찬가지며, 눈으로 사물을 인식할 때도 마찬가지이고, 현대 물리의 비시각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 조차 그러하다.


학습은 감독을 필요로 한다. 감독은 자신의 개념을 이미 선행된 경험을 다시 경험하는 자에게 의미를 부여해주는 행위이다. 또는 선행한 경험을 전달한 적이 없는 상황이라면, 가장 합리적인 해석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스스로 감독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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