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만드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이다, 잡는 것이다.


기회주의자란 기회라 생각되면 현상태를 포기하고 얼른 잡는 사람을 말한다.
같이 있는 사람에게서 기회란 곧 헤어짐을 수반할 수 있다.
같이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언젠가는 그런 기회가 올 것이다.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니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오는 것이다.
세옹지마처럼 지금은 어려우나 곧 기회가 올 것이다.
난 한 가지를 깊이 팠고, 그랬더니 기회가 왔을 때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늘 곁에 있는 것이 아니야. 있을 때 잘해.

이상 기회에 대한 브레인 스토밍 끝!

이 글을 생각하게된 동기는 기회란 잡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에서 출발하였으며, 몇 분 연상하여 얻은 결론은 그것과는 별개로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기부여성 문장들이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독려하여 내 생각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돕거나 같은 흥미를 갖게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신나는 것인가 그것은 나아닌 나를 만드는 것 또는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글은 나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둘, 나아가 넷을 향해 쓰는 글이다.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습성을 전염시키는 존재이다. 그것은 오래 같이 일하다 보면 농담의 유형을 파악하고 썰렁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같은 운동을 하는 것, 같은 음주 패턴을 지니는 것, 같이 밥먹고 배고파해하고 군것질하는 것 등 모든 것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나아가 공유되는 본능을 지닌 존재이다.

기회라는 것과 연관된 것으로 사념을 펼쳐보자면, 난 개발팀의 리더이므로 팀원들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내어 필요한 개발을 적절한 시간안에 끝낼 수 있어야하는 능력이 기대되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 난 끊임없이 이들이 나와 같은 지식기반을 갖도록 기사들을 스크랩해서 돌리고, 내가 주로 사용하는 기술에 대해 전수하고, 공유에 필요한 세미나를 시키며, 객관적인 데이터 및 경험을 나누기 위해 필요한 테스트를 수행시킨다. 또 개발외에 신뢰를 주고 받기 위한 인간적인 일들을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내가하는 일들은 모두 기회 투성이이다. 팀원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면, 난 슬프게도(?) 더 나은 곳으로 가고자하는 이들의 마음을 허락해야만한다. 누구에게나 기회란 중요한 것이니까. 인생 전체를 통털어 얘기하자면 우린 같이 일할 기회 속에 있는 것이고, 다른 기회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커다란 기회속에서의 현상태를 포기하는 결과를 수반하는 것이다. 아무리 오래 있어도 3년이면 다른 기회가 누구에게나 오게 된다.

난 이들의 능력을 계속 보고 있기 때문에 적절히 어려운 일들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상황에 따라 분배를 한다. 이때 작용되는 것 또한 나에게 있어서는 판단이지만, 내 속을 바로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평소에 준비한 것에 대한 기회가 찾아오는 것이며, 그것에 따라 심각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사회 초년시절 대리 1년차까지의 생각은 나에게는 어찌하여 훌륭한 사람들이 회사에 들어오지 않나, 훌륭한 사람들과 같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이냐는 푸념어린 것들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기회가 되었는지 아니면 본디 내 습성이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혼자일을 처리해야하고 혼자서 그 어려운(!) 것들을 나름대로 이해해가면서 즐거움반 짜증반의 생활을 해 왔던 것 같다.

이제와 "기회의 잣대"를 빌어 설명하건데, 그때의 나는 "기회란 만드는 것"이라는 명제를 경험하는 중이었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 내 위 상사에게 몸 값을 높히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자유도를 높히게 되었다. 내가 아는 것들을 그 주위에 모두 말해 댈 수는 없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깊고 넓어질수록 그것은 기회에 대한 끊임없는 생산이 된 것이다.

몸 값이란 부르는 게 값이다. 내가 몸값을 부를 때는 1년에 한 번 연봉 협상에서나 필요하고, 다른 사람이 그 몸값을 부른다는 것은 "인정한다, 기대한다, 과연 그렇다"의 뉘앙스를 지닌 1년 내내 마음 속으로 불러 대는 평가를 말하는 것이다. 기회는 결코 인정할 만한 뭔가를 풍김없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기회와 관련된 생각을 논할 것이라면, 그 어떤 거창한 브레인 스토밍 어구들보다 이 말을 가장 앞에 두어야할 것이다.

난 다른 사람이 기회를 줄 만한 뭔가를 계속하고 있나?
난 다른 사람보다 먼저 그 기회를 잡을 만하게 포장해 보이고 있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생각해볼 일이다.
  1. june8th 2005.03.29 14:11

    누가 어디 간데요?

  2. 2005.03.31 00:42

    아니... 전혀... 그냥 잡생각을 정리하느라 쓴 글이야.

  3. sj 2005.04.14 21:22

    may i borrow your words...? i want to share with other people...

  4. 2005.04.18 07:52

    Sure, if you make clear the source of the copy :)

바퀴를 다시 발명하면 안되나?

다시 발명하지 말아야할 이유는 전임자의 노력을 조사하지 않고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을 막기위해서 이겠지만,
우리는 바퀴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볼 몇가지 이유가 있다.

바퀴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이라.

# 널리 쓰이고 있다.
# 척보면 그 원리가 뻔해서 비밀이 없다. (타이어의 복잡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이 원이라는 얘기)
# 조금 어렵다 싶은 것도, 상당히 많은 문서를 뒤져서 찾아낼 수 있다.

위와 같은 조건을 만족하지 않으면, 다시 발명해도 좋으리라. 이 글을 쓰는 것도 누군가 비슷한 글을 썼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쓰는 이유를 바퀴 발명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이 글은 3번에 대한 게으름 때문에 쓰는 것이다.

위와 같은 세가지 조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퀴를 새로이 발명할 필요가 있다. 왜냐고?
바퀴를 한 번이라도 만들어본 사람과 만들지 않고 학습한 사람에게서의 차이는 명품에 대한 가치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론 명품의 가치는 많은 것을 보아온 사람도 알 수 있지만, 만들어서 아는 것과 보기만 해서 아는 가치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마치 전문 축구 해설위원인 신문선과 선수 및 감독출신으로서의 차범근 해설위원의 차이를 생각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바퀴를 다시 발명하지 말라는 말에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생각일랑 당장 접어치우고, 오늘부터 바퀴가 다시 발명될 때까지 멈추지 말자.
  1. 2005.03.06 02:32

    아직 오픈하기전에 주신 Carmel 님의 코멘트는 지웠습니다.. 쏘리.. :)

http://www.chriswetherell.com/hobbit/default.asp 호빗식 이름 지어주는 사이트
http://www.aspalta.cbc.ca/deaddog_asp/aininfo.asp 인디언식 이름 지어주는 사이트
http://www.emmadavies.net/fairy 요정식 이름 지어주는 사이트
"나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아야한다"는 말은 간혹 사람을 무기력하거나 고착되게 만든다.

내 인생의 퀀텀 점프는 그런 한계를 갑자기 뛰어 넘어 다른 궤도에 올린다는 말인데,
한계를 아는 것과 그 한계를 넘어야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퀀텀 점프라는 말이 멋있는 말처럼 들릴 것이다.

난, 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애초부터 한계라는 것은 없었다.
선을 그어 놓고 사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어쩌면,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살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생활의 모습에서 나온 생활 패턴이 아닌가 한다.

그런 한계를 긋는 일을 일반화하여 자신의 능력에도 적용하는 것이 아닐까....

내 능력과 내 관심사를 제한하는 것은, 쉽게 어떤 일에 대해 배타적이 되거나
관심 밖의 영역이라 치부하여 대화를 멈추는 것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한계는 애초부터 없었으며, 퀀텀점프도 따라서 없다.
그저.. 계속 나아지는 것 뿐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계속...
창조란 "공허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창조란 "질서와 상식에 대해 변형을 가하여 다른 질서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기존 질서를 부분적으로 파괴하는 속성이 있다.

결국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유에서 다른 유를 창조하는 것의 차이일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중간 과정이 없이 마지막 모습을 이룬것일까?
중간존재를 가정하는 순간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므로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나 질서와 상식에 대해 변형을 가하는 것은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에서 유라는 것과 유에서 다른 유를 창조하는 것으로 대치될 수없다.


유에서 다른 유를 창조한 다는 것은 중간 존재를 먼저 만들고
중간존재의 재결합을 말하는 발명수준의 것과,
마지막모습에 대한 변형을 이루어, 다른, 하지만 비슷한 질서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분리될 수 있을까?

창조가 공허나 혼돈에서 질서로 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라면,
공허가 아닌 혼돈에서 질서에 대한 것은 중간존재의 재결합을 말하는 것이며,
결국, 무에서 마지막 모습으로바로 귀결된 창조보다는
중간 존재를 건너이루어진 모습을 말함이리라..

내가 화학에서 놀란 것은, 원자들이 사실은 다양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의 숫자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원자는 그러한 작은 입자를 중간존재로 하는 안정된 질서체계, 즉 마지막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 원자들이 분자를 이루고, 분자들이 모여 유기물과 무기물,
나아가는 호흡이 있는 생명의 근간을 이룬다.
결국, 생명에 대한 것을 단지 물질의 관점에서 보면,
흙으로 만든 것이며, 처음부터 무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게 된다.

내가 보기에 작은 입자들의 조합에 의한 다른 원자를 만드는 것부터
마지막 모습에 대한 변형을 이루어 비슷한 질서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창조란 재료와 결과에 대한 과정을 말한다기 보다는 "의도"의 존재에 대한 것을 말한다.

결국엔 공허와 혼돈에서 질서가 생겼고, 인간들은 비슷한 창조성으로
질서에 약간의 변형을 가하여, 기존질서에 대해서는 혼돈이라 여겨지지만,
다른 질서를 이루는 것은 극히 현상만을 다루는 문제이며
이들이 창조의 본질문제에 들어가서는 아니될 것이다.

창조란 의도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따라서 의도있게 진화되었으면, 그것도 창조아닐까?


뉴스엔조이의 기사에 대한 독자의 글중에 유시민 복장사건과 관련한 글을읽다가 생각난것을 전개시켜보다가.... 썼다.
국민학교 들어 가기전의 기억은 몇개 없다.
태어난지 6년이라는 시간동안의 기억이 단 몇 컷이라니,
정말 컷으로밖에 기억되지 않는 순간만 흑백으로 들어 있을 뿐이다.
내 어릴 적 사진으로부터 기억과 분리해서 적기란 힘든 것이다.
지금 적는 것은 사진으로 갖고 있지 않는 기억들이다.
사실 어릴적 사진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기억하는지, 원래 기억하고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 동생 수술 받아 입원해 있는 날, 아버지는 손수 밥을 하셨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시고...
* 어느날, 부산에 살고계시는 (현재는 부천에 사시는) 고모부께서 장난감 탱크를 사오셨다.
그놈은 뿅망치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는 윗부분을 치면 실제로 플라스틱 포탄이 앞으로 나가는 위력적인 장난감이다.
* 동생이 팔에 화상을 입었다. 재진인지 인선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 동생이 변을 잘 못보는 것 때문에 관장을 했다. 재진인지 인선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박정희가 죽었다는 신문을 보았다. 누군지는 몰랐을것 같다.
전화를 통해 도움을 요청할때, 최근의 서비스는 지능적인면이 있다.

''' "지금은 전 상당원이, 통화중이오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이런 것은 어떨까?

''' "당신은 지난번 통화때, 75번 상담원과 통화하셨습니다. 현재 75번 상담원은 통화중오니, 대기하시려면 1번을 다른 상담원과 연결을 원하시면 2번을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

프라이버시 문제가 생길 수 있을까?
구내 전화의 경우 외부로 나가는 모든 발신자 전화번호가 같을 수 있으므로, 조금 효용이 없겠구만.
그렇다면, 시작번호가 이동전화 번호라든지, 별정통신 사업자가 아닌 식별번호일 경우에만 저장할 수 있는 옵션을 가진다면,
ARS 시장에 도움이 될 것도 같은데 말이지...

없다면.. 누가 만들려면 만들던가...
에잉.. 나몰라라..
2002.2.27. Wed.

이글은 사람이 어떻게 욕심을 부리게 되는가에대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어린아이를
키우다보니 신기한것중 하나는, 배고플때 젖을 물리면 먹고 싶은 양 이상은 먹지 않는
것을 보았다. 정말 단순하지만, 이 아이가 언제부터는 자기가 먹고 싶은양 외에도 더
먹는 날이 올 것이다. 아까워서, 또는 맛있어서. 어떻게 그런 변화가 생기는 걸까.
누가 그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라는 암시를 주었을까?

생명이라는 것은 자극을 받으며, 외부 세계와 통신을 하게 된다. 그 상황의 다양한
반복이 자기 존재와 생명이라는 본능과 연관되어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자극에는
다음 세가지의 경우가 있을수 있는데, 이는 생명이 처하게 되는 기본적인 상황이다.

첫째로는, 자극이 없는 상황인데, 사람이 자극이 없다보면, 아마 죽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것은,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며, 그것은 본디 관계를 통해 자기를
알아가는 샘명 현상의 기본적인 능력을 거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적당한 자극이 있는 상황이다. 적당한이라는 말이 참 애매한데, 인간은 그
자극을 느끼는 어느정도의 한계가 있으며, 그 이하는 자극이라하지 않고, 그 이상은
무리한 자극이라 한다. 이 한계를 역치라하며, 역치는 성장하면서 늘어 나는
것이며, 그 역치 정도에서 받는 자극은 "일상"이라는 말로 표현 된다.

세째는, 과한자극을 말한다. 위에서 말한, 역치이상의 자극이며, 의식, 무의식적으로
역치이상에 대한 자극이 모여, 성장하게 된다. 아이가 걸을 수 있게 되기까지 수많은
역치이상의 자극에 대한 경험이 바탕이 된다.

이 세 가지 경우를 보건데, 성장이라는 것은 과한자극이 조금씩 쌓여 생명을 강하게
만들고, 강한 자극 속에는 일부, 성취감과, 어떤 만족이 수반되므로 즐거움으로 남게
된다. 이때, 과한 자극의 한계를 우리는 두려움이라 부른다. 적당한 자극만 있는
일상을 벗어나, 과한 자극이 주어 지지만, 그 과한 자극의 어느 정도에 대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며, 이는 뇌리에 두려움이라는 경험으로 존재하고, 이는
자극 받는 방법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남게 된다.

어릴때에는 적당한 자극에 대한 역치가 너무 낮아, 어떤 조그만일을 해도 과한
자극에 대한 경험이 되며, 성인 봤을때는 늘 모험하며 지내는 삶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과한 자극은 이렇듯 성장을 수반하면서 동시에 두려움에 대한 경험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두려움. 이는 생명으로 하여금, 미래를 준비하게 만든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현재 필요한 것이상을 소유하도록 의지를 발동시키며, 여기에서 의지의 역치가
과도한 의지에 의해 늘어 나게 되고, 이를 우리는 욕심이라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탐닉이라는 것은 그 근본이 두려움에서 출발한 "미래대응의지"를 잊고, 두려움과는
상관없이 자극에 대한 역치 이상에서 즐기는 상황을 말한다.

자극은 인간이 느끼는 모든 일차적인 외부의 정보이며, 인간의 지능은 이 자극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하는 정보체계에 의해 반응하는 복잡한 이성체계를 가지고
있다.
2003.3.28. Fri.
가슴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부터 머리로 생각한다는 개념이 보편화되었을까?
과연 생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정신적 활동은 육체의 자극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또는 그 반대는 어떤관계에 있을까?

이 생각의 시작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미이라를 만들때, 코를 통해서 뇌를 빼낸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 이유는 그들 문화에서는 생각하는 위치가 가슴이라고 여기는 데
있다고 들었다. 그말이 사실이건 거짓이건간에,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했으며,
당장에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생각하는 기관이라고 알고 있는 집단을 상상했으며,
그런 문화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를 즐거운 상상쯤으로 사유해보았다.

그 뒤로 시간이 날때마다, 가슴으로 생각해보려고 했으며, 심지어는 머리가 아닌
손가락 끝으로 생각을 해보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당히 어렵다.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려는 생각조차 머리에서 일어난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머리로 생각한다는 보편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이 혹시 우리의
가장 큰 외부 기관인 눈과 귀가 머리에 붙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아니면,
뇌라는 기관이 정신활동 중추라고 배워왔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생각 즉 사고, 정신활동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기억하는 것? 판단하는 것?
아니면 그런 종류의 복합활동?

머리가 아플때, 우리의 생각이 끊기는가? 오히려, 통증을 느끼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생각은 방해를 받는 수준이다. 결코 생각의 흐름을 막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생각이라는 것은 어떤 신체기관과 연결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흔히 뇌의 어느 부분이 이상이 생겨 지체 장애가 생기고, 언어나 발달 장애가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라는 것은 정신 장애인도
하는 것이며, 결코 신체 어느 부위와 연결시켜 이해하지 않아야한다는 것이다.

생각은 자극에 독립적이지만 이것은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독립성을 띄기 어렵게
된다. 가슴으로 생각하는 방법이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을 넘어
자극과 독립하여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다면, 가슴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아니라
발톱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며, 떨어진 머리카락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리라...

졸리우기 때문에 생각이 멈춘다는 것에서는 아직 생각을 덜해보았다.
2002.5.10. Fri.

1. Application 프로그래밍은 단지, 여자친구를 만나, 커피마시고, 영화보는 수준이다.

2. Kernel 모듈, Device Driver 프로그래밍은 섹스하는 느낌처럼 짜릿하다.

Embeded는 로보트와 하는 기분일걸... 사실안해봐서 모르겠다.

3. 흐름이 명쾌하며, 예외가 제대로 처리되고, 리소스의 생성소멸이 쌍을 이루는 코드는 제법 섹시한 프로그램이다.

4. 뭔가 Polling하는 소스가 상당히 빠른 주기라면, 수다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치 여고 동창회가 있는 음식점 구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랄까..

5. 포인터 없이 커다란 객체가 copy되는 모습은 언젠가는 끊어질듯한 밧줄다리를 코끼리 타고 넘어다니는 기분이 난다.

6. const 없는 인자를 갖는 함수를 호출하면 뭔가 항상 뭔가 도둑맞는 느낌이든다. 바뀐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7. 주석, cpu는 모르는 우리들만의 언어.

8. Warning, compiler의 훈수. 때로 우리는 무시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9. header의 선언문 하나하나를 이해할수있는 당신, 떠나라. 그리고 세상을 야리면서 하는말. 따라올테면 따라와봐.

10. STL 컴파일 error를 이해한다는 것은, 신성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줄거야....
  1. ^^ 2005.10.31 17:33

    이런... 너무 멋진 글이잖아요!

  2. 주인 2005.11.02 16:05

    자그마치 3년전에 쓴 글이군요. 그런데 누구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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