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신체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아닌 제6감, 영적인 눈, 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평가하는 일차 기준은 그런 감각이나 경험을 주위 사람과 후대에게 물려 줄 수 있는 합리적 설명이 가능한가이다. 그 설명에 공감하는 수준의 사람들을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으로 이해되려면, 그 설명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토의를 진행해가며, 설명의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어야한다. 그렇게 해도, 모든 설명은 완벽할 수 없다. 완벽하지 않은 설명이라할지라도 그것이 갖춰야할 최소한의 조건은 "합리성"이며 "객관성"이다. 


그 다음엔 세대를 걸쳐 살아 남는 설명이어야한다. 이것은 마치 진화가 동작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어떤 국지적인 환경변화에 적응하여 살아남은 개체가 자신의 형질을 후세에 물려주는 것처럼, 그 설명 또한 많은 상황에서 인용되며 지속적인 보완이 이루어져야한다. 또한 과거에 박제되어 멈춰있지않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상황을 유지하여야 그 합리성과 객관성이 유지된다.


합리성이란 무엇일까, 합리성을 논의하기 전에 언어가 가지는 전달도구로서의 기능을 얘기하자면, 단어는 어떤 개념을 대표한다. 그 개념이 두 화자사이에서 일치함이 전제되지 않으면 전달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 개념들은 서술의 구조속에 녹아들어 있고, 서술은 화자들이 선행하여 습득된 개념을 일련의 순서대로 되살려내는 방식으로 그 전달기능을 수행한다. 합리성이란 그런 선행되는 개념이 되살아 나는 방식에 모순이나 모호함이 없음을 뜻한다.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의 말이 대표하는 선행개념들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서술이 전개되는 것을 말하며, 이차적으로 그 말에 대한 개념이 서로 일치하더라도 서술에 모순이나 모호함이 제거되지 않은 채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대화는 종종 이런 합리성이 제거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진행되어가다 수위를 넘는 순간 멈추게 된다. 심지어 말하는 사람은 자신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생각한다. 여기서 합리적이지 않음에도 합리적이라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은 일반적인 사회현상이나 과학현상의 설명에서 보다 신적인 영역의 감각이나 경험을 설명할 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영역을 설명할 때 더 그러하다.


아, 지겹다.


이것이 어떤 범주에 드는 생각인지 잘 모르겠으나 생각이 더 진전되기 전에 기록을 해두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병마개는 오른쪽으로 돌리면 잠기며, 왼쪽으로 돌리면 열린다. 다른 말로하면, 오른쪽으로 돌리면 병마개는 아래로 진행하고, 왼쪽으로 돌리면 위로 진행한다. 이것은 나사못을 돌릴 때도 마찬가지이며, 선풍기 날개를 제외한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나선 홈이 있는 원통 구조체가 가지는 표준(?)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방법을 헷갈릴때가 있는데,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 있는 나사, 특히나 책상 밑부분에 위로 박혀 있어서 손을 한 번 꺽어서 돌려야하는 곳에서는 늘 한 번 생각하게된다. 물론 그 나사가 쉽게 돌아가는 상태라면 양쪽으로 돌리다보면 헐거워지는 방향으로 또는 조이는 방향으로 원하는대로 돌릴 수 있지만, 힘을 줘야하는 경우에 혹시 잘못 돌리지 않았나 하면서 생각하게되는 순간이 있다. 이 때, 내 경험상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일단 눈으로 보면서 손으로 풀거나 조이는 동작을 한다. 허공에 대고 계속 손동작을 반복하면서 보이지 않는 그곳에 있는 나사에 손을 가져가서 나사를 돌린다.

둘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먼저 확인한다음 나사가 박힌 위치는 처음 상황과 비교해서 위아래를 뒤집은 상태임을 인식하고 그 방향을 바꾸는 방법으로 나사를 돌린다.


이 두가지 방법 중 하나가 동원되어야할 상황이 올 때마다 생각난다. 몸이냐 머리냐 그것이 문제로다.




  1. blueboh 2016.01.04 14:56

    여긴가

  2. blueboh 2016.01.04 14:58

    댓글 화면 이상해..너무 커

어떤 상황을 설명할 때 과학적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을 소설에서 발견하면, 소설의 재미마저 급하게 떨어진다. 사실주의 시각을 잠시 내려 놓는 일이 이리 어려울 줄이야.

스토리에 집중해야하는 윤소라의 소라소리 같은 팟캐스트를 들을 때도, 내용에 집중해야하건만 으레 그렇듯 난 딴 생각이 든다. 정확히는 내용을 따라가는 의식과, 또 다른 딴 생각 의식이 동시에 진행된다. 오늘 든 딴 생각은 이렇다. 소리는 귀로 감지하는 연속적인 공기의 진동일 뿐이지만, 인간이 내는 목소리는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시간에 따라 실리게 되므로, 단순한 진동이 아닌 것이다. 귀는 소리의 주파수(20Hz~20kHz) 별로 감지하는 영역이 다르다고 알려져있는데, 어느 순간의 목소리는 여러 주파수가 섞여 있으며, 각 주파수는 귀의 다른 영역을 각각 자극하고, 귀에서는 각 부위가 동시에 정보를 받아 하나의 패턴을 이루며, 그것이 시간에 따라 연속적으로 변하는 것을 목소리라 한다.


이러한 시간에 따른 공기의 진동 변화에 감정이 실리고, 의미가 실린다. 그런 소리를 받아서 기존에 학습된 패턴중에 제일 큰 진동을 일으키는 패턴이 소리 회상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의미를 부여받게 되고, 시간에 따라 부여되는 의미 열이 또하나의 패턴이 되어 또다른 의미 회상과정을 통해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하게 된다. 여기서 소리회상과 의미회상은 전적으로 지금 만든 말이므로 크게 전문성에 구애받지 않기로 하자.


경험했다라는 것은, 과거 어느 때 대상을 인식한 적이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결코 인식한 적이 없는 것을 회상해 낼 수 없다. 어떤 구체적인 경험이든 추상적인 심상이든 그것이 한 번 의식 속에서 자리를 잡은 과정이 있어야만 다시 회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국어를 학습할 때도 마찬가지며, 눈으로 사물을 인식할 때도 마찬가지이고, 현대 물리의 비시각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 조차 그러하다.


학습은 감독을 필요로 한다. 감독은 자신의 개념을 이미 선행된 경험을 다시 경험하는 자에게 의미를 부여해주는 행위이다. 또는 선행한 경험을 전달한 적이 없는 상황이라면, 가장 합리적인 해석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스스로 감독해야한다.



나는 가끔 상상해본다.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사실 국민학교 시절에도, 내가 아는 모든 것을 공책에 써 본 적이 있었다; 쓰다가 포기하긴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떠올리다보면, 항상 따라오는 생각은 미래엔 어떤 것들을 알게 될까

혹은 내가 사라지고 난 몇 백년뒤의 사람들의 지적인 수준은 어떠할까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 종이 출현한 20만년전 이후로 유전적 성질은 변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하면, 20만년전 신생아를 현대로 데리고와서 길러도 지적인 능력은 현대인과 다를바 없다는 뜻이다.


관심이 있는 것은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생각인데, 이것은 과거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세상과

현대인이 알고 있는 세상이 다르듯, 미래 사람들이 알게 될 세상이 지금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인류 보편적인 이해를 잠시 생각하다보면,

20만년동안 유전적으로 같은 사람들이 각자 속해 있는 시대적 환경에 따라

그렇게도 세상은 다르게 인식돼 왔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인식 메커니즘에 대한 관심으로 생각이 옮겨가게 된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유전자에 박혀 있을 듯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은 그대로인데, 내용은 다른 것들로 채워 왔을까.

아니, 또 앞으로 채울 수가 있을까.


1.

어떤 것이 이름을 얻어 다른 것과 구별된다.

그 어떤 것이란, 보편적인 것일 수도있고, 유일한 개별자일 수도 있다.

이름을 얻게되는 것에는 개념의 경계가 존재한다.

개념의 경계는 경계 너머 다른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개념의 표면을 2차원에 도식한다고하면, 무한 2차원 평면일까 닫힌 2차원인 구의 표면일까.

다른 말로하면, 개념의 경계는 다른 개념과 이어진 것일까 아니면 미지의 경계를 상정해야하는 것일까.


2.

어떤 경우는 관할한 결과를 해석하기 위해 추론이 발전한다.

어떤 경우는 추론을 하고나니 어떤 발견이 예견되어진다.


3.

인간의 개념의 확장은 관찰과 그 해석의 긴장속에서 일어난다.

어떤 개념은 관찰을 통해서 확장되거나 새로 추가되었고,

어떤 개념은 추론을 통해서 확장되거나 새로 추가되었다.


4.

어떤 영역에서의 무작위성, 무작위가 무작위가 아니게하는 이론의 출현.

이런 상황은 정밀도높은 관찰이라는 도구를 통해 해석하는 방법이다.

어떤 방법에서의 무작위성, 무작위가 무작위가 아니게하는 의도의 출현.

어떤 것을 추론하기 위해 도입하는 방법의 특이성은 그간의 시행착오속에서 버리고 남은 것들에 대한 체념에서 출발한다.


얼마나 빨리 처리해야하나....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성격을 묘사할 때, 수 많은 방법이 가능하다. 그 수 많은 방법 중 하나가 최초 발화자에게서 선택되어 묘사된 후 전달자들은 큰 생각 없이 다시 쓰기 마련이다. 내가 어떤 사건에 대한 묘사를 들었을 때, 중립적인 위치에서 듣고자한다면, 그 때 제일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 그런 묘사에 사용할 때 어떤 단어 혹은 표현을 통해 들었는지를 기억해두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측면의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게 되었을 때, 그 단어나 표현을 그대로 듣게 된다면, 그것은 최초 발화자와 전달자의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고, 이렇게 듣다보면 상황을 시간 순으로 배열할 수 있어 입체적 파악을 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어떤 상황을 최초로 묘사하게 될 때 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것에만 집중하지, 자기가 선택한 말이나 표현에 대해서는 잊는 경향이 있다. 또한 전달하는 사람들은 그 상황을 빨리 전달하고자하는 생각이 강하므로 그 상황을 다른 말로 표현하기 보다 그대로 전달한다.


end.

핍진 (逼眞) : http://dic.daum.net/word/view.do?wordid=kkw000283215&q=%ED%95%8D%EC%A7%84


핍진성이란 말은 일본어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문학용어이다. 현실을 얼마나 근사하게 그려내었는지에 대한 용어. 정말 현실에서는 거의 안 쓰는 핍진이라는 말을 요즘은 가끔 듣는다. 문학 팟캐스트를 듣다보니. (국경시장 작가인 유쾌한 소설가 김성중씨도 인터뷰에서 쓰더라마는)


핍의 한자를 찾아보니 그 용례에 있어서도 그닥 한국어에서는 자연스럽지 않다. "죄다", "독촉하다", "접근하다", "좁다"라는 뜻을 가졌지만, 죄다의 의미인 핍박하다 정도가 가장 흔한 예이며, 핍진의 핍은 형용사로서 "좁다" 정도로 쓰인 것인데, 한국어에서 핍을 좁다라는 용도로 사용하는 말은 거의 없으므로, 이 단어는 정말 허세용어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흠...

아침에 전날의 노동(?)에 의해 힘이 다 빠져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때라 할 지라도, 오늘 할 일이 내 생계 혹은 즐거운 일이라 생각한다면, 어디선지 알 수 없는 힘이 솟는다. 그러나 이 말은 그저 단순한 직장인으로서 갖기 어려운 자세에 대해 하는 말이며, 대부분은 계약 관계에 의해 끌려가는 느낌만을 갖게 된다.


정말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을 하는 상황에서 저런 최면을 건다는 것은 또 다른, 차 상위 층위에서의 굴욕감을 느끼게 한다.


동성애에 대한 짧은 생각

(오바마 정부에서, 미 연방헌법에서 동성결혼이 허용함에 부쳐)


1.

난, 가끔 집안 모임에서는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할까봐 걱정하는 눈초리를 받는다. (우스개 소리로 지나가면서 받기는 하지만.) 수년전부터 동성애뿐 아니라 성적 소수자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서 시간날때마다 얘기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른 바 흔한 동성애 문제는 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더 하고 싶은 얘기들은 모노가미, 폴리가미랄지, 양성의 생식기를 다 가진 기형, 무성애자, 양성애자의 결혼 등 더 사회문제가 되지 않은 부분을 얘기하고 싶었으나 주위에선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동성애만 화제에 오를 뿐이었다.


일단 동성애에 대한 내 생각부터 정리하자면, 아니 이 모든 논의의 시작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인간은 친밀감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그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모든 생명체의 고유한 속성에 해당한다. DNA 보전이라는 유전자의 이기적인 속성들이 나타내는 다양한 방식으로서 친밀감이 발전했을 뿐이다. 어떤 종은 자웅 동체이기도하고, 어떤 종은 암수가 분화되어 있지 않기도하며, 어떤 종은 태생이 결정되지 않은 것처럼 암수의 성격을 바꾸기도 한다.


인간은 암수 (혹은 남녀)로 구별되어 있지만, 이런 생명체의 유전적 분화의 역사속에서 암수로 분리되는 것이 DNA 보전에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인 것이지, 반드시 이런 분리만이 자연계에서 통용되어야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DNA는 수많은 변이들이 하나의 Pool을 이루고 있으며, 이 안에서 나타나는 다양성이 그 종의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나타내게 된다.


인류 보전을 위해서 성적 지향성은 이성 상대를 향하는 것이 대다수이어야 하겠지만, 그 외의 성향이 인류 DNA 풀에 있는 것 또한 언젠가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지도 모를 일이다. 모노가미/폴리가미의 문제만 보더라도 전쟁/질병으로 인해 남성의 수가 극도로 줄어든 상황에서는 일부다처 혹은 형사취수제는 사회의 미덕이었고 그것 또한 인류 보전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작동하던 때가 있는 것이다.


2.

프랑스 혁명 이후 많은 국가들은 공적 교육이 의무화되어 가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학문의 분화가 심화되어 있다. 이런 사회에서 교육의 의무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생각을 중요시하는 사회를 만들게 되며, 획일화된 방법의 사회통제가 불가능한 시대를 만들게 된다. 종교의 위치 또한 카운셀러이지 교조화되어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게 되었다. 게다가 과학적 사고방식은 합리성을 근거하지 않으면 설득이 되지 않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고, 공식적으로는 합리적인 근거를 통해 사회가 돌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합리성의 사회에서 성적지향에 따른 차별은 맞지 않는 옷처럼 보인다. 이런 사회에서의 차별금지에 대한 생각이 공공연하게 넓어지는 것 또한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3.

놀이로서의 성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일단 성행위가 놀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면 할 얘기가 없다. 이 놀이를 누구와 하느냐의 문제와 어떻게 노느냐로 구별해야한다. 누구와 하느냐의 문제는 이성, 동성, 그룹이 있을 수 있고, 어떻게 노느냐는 각종 체위와 다른 자극을 추구하는 여러 방법에 대한 것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수많은 조합에서 중요한 것은 놀이 주체들의 합의가 있느냐 그리고 나아가 위생적으로 하고 있느냐이다. 그런 합의하의 놀이와 자신의 성적지향 혹은 취향이 필요 충분조건으로 있는 것이다. (놀이가 아니던 시절에는 이성간 정상위 밖에는 허용하지 않게된다.)


4.

사회적 합의를 무시하는 개인의 문제가 3번 같다는 것이고, 사회적 합의 안에 있는 사람은 그 interface를 지킬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 사회적 합의는 합리성의 시대에 현대 생물학과 다양화된 학문을 수용하는 교육이 지속되는한 계속 확장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상 짧은 생각 끝.

1) 상황을 기술하는 표현

객체는 시간, 공간에서의 상태가 있다.

객체의 시간, 공간에서의 변화를 나타낸다..


2) 감각기관을 통한 느낌을 기술하는 표현

오감을 통한 자극의 유무 혹은 자극의 정도를 나타낸다.

오감은 하나 이상의 자극이 동시에 있을 수 있다.


3) 정도를 기술하는 표현

어떤 단위를 기술하는데는 정성적인 표현이 있다.

어떤 단위를 기술하는데는 정량적인 표현이 있다.


4) 감정을 기술하는 표현

인간 내면의 기분을 나타낸다.

외부 변화에 대한 감각기관을 통하거나 내면의 생각의 흐름에 따라 기분의 변화가 있을 수 있다.


5) 행동을 기술하는 표현

단순한 근육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둘 이상의 움직임을 동시 혹은 시간순서에 따라 수행하는 단위를 표현한다.


6) 비교 및 대조

선행하여 잘 알려져 있는 것과 비슷한 것 혹은 대비되는 것을 통하여 기술하는 표현


7) 의지, 욕망의 표현

1~5의 방법으로 기술되는 일 혹은 상태가 미래에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바람


8) 대명사, 대동사

1~5의 방법으로 기술되는 것을 다시 언급하기 위한 표현


9) 요약 그리고 서술

긴 문장 구조를 같은 내용을 가진 단순한 표현으로 다시 기술한다.

짧은 문장을 다른 표현을 써서 길게 기술한다.


10) 순서 및 나열로 표현

1~5의 기술이 복잡할 경우 순서대로 혹은 순서없이 나열하여 표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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